신돈 4회 <신돈> -4회- #소설산의 계곡 봇짐을 짊어진 신돈이 계곡을 따라 산으로 올라가고 있다. #동. 보우의 암자. 앞 조그만 암자. 신돈:...... 계단을 올라가 암자의 문을 조금 열고 안을 들여다본다. 암자 안엔 작은 불상과 향로 하나. 누군가 향을 피워 놓았다. 신돈:....... 인기척에 뒤돌아본다. 동자승 하나가 짐꾸러미를 들고 언덕을 올라오고 있다. 신돈:(반가워서) 보우스님은 어디 계신가 동자승:.... 신돈을 아래 위로 훑어보더니 암자로 들어간다. 신돈: 나는 개태사에서 보우스님을 만나러 온 편조라 하네 대꾸없이 가지고 온 짐을 암자 안에 내려놓고 다시 나오는 동자승. 신돈을 무시하듯 다시 언덕길을 내려가기 시작한다. 신돈:(좀 화나서) 보우스님을 뵈러왔다고 하질 않느냐 동자승:..... 뒤돌아보더니 산쪽을 가리키고 다시 돌아서 가버린다. #동. 부근 산비탈 신돈, 온다. 보우가 밭을 갈고 있다. 신돈:(환하게 웃으며) 여기 계셨습니다. 스님께서 소설산으로 들어가셨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길입니다 (봇짐을 풀며) 보우스님. 소인이 술과 고기를 좀 가지고 왔습니다. 밭일은 그만하시고 우선 요기부터 하시지요 보우:.... 못 본 듯 밭만 가는 보우. 신돈도 그런 보우를 무시하고 가지고 온 고기를 꾸역꾸역 입에 처넣는다. 신돈: 보우스님. 녹야원에서 하안거를 끝마친 부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술과 고기를 배불리 잡수셨다고 하던데 그게 사실입니까? 하긴 풀뿌리만 뜯어먹고 무슨 힘으로 고행을 하겠습니까 보우:..... 일을 잠깐 쉬고 허리를 펴는 보우. 등을 손으로 탁탁 치며 산 아래를 바라본다. 그러더니 신돈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암자 쪽으로 간다. 신돈: 스님. 보우스님. 이 고기 맛 좀 보고 가세요. 보우스님 드리려고 가져온 고기를 이놈이 다 먹어치우게 생겼습니다 #동. 부근 계곡 손발을 깨끗이 씻고 있는 보우. 바위 위에 걸터앉은 신돈. 신돈: 보우스님. 달마대사의 얼굴이 어째서 산 도적같이 생겼는지 아십니까. 원래는 잘생긴 귀공자셨는데 하루는 길을 가다 죽어가는 구렁이를 보고 급한 김에 혼만 빠져나와 구렁이 몸 속으로 들어가셨다는 겁니다. 헌데 구렁이를 살려놓고 다시 밖으로 나와보니 달마대사의 몸뚱아리를 어느 놈이 가져가버렸지 뭡니까? 다시 구렁이 몸속으로 들어가 평생 구렁이 탈을 쓰고 살 수도 없고....해서 망연자실 서있는데 마침 산도적 하나가 죽어 자빠져 있더라는 겁니다. 옳거니. 이 놈 몸뚱아리를 빌려야겠다 (낄낄 웃으며) 그래서 달마대사의 얼굴이 산 도적처럼 변했다는 겁니다 보우:(몸을 정갈하게 씻고 있다) 신돈:(정색하고) 보우스님. 스님께서도 이 몸뚱아리 저 몸뚱아리 마음대로 옮겨다닐 수가 있습니까? 혼이 자유로운 것이라면 못할 것도 없지 않습니까 #어느 바위 앞 바위를 향해 두 눈을 부릅뜨고 마주앉은 신돈. 보우가 지나가다 힐끔 바라본다. 신돈이 몸을 부들부들 떤다. 그러자 앞에 있는 바위가 갈라지듯 금이 간다. 신돈:...... 슬며시 눈을 돌려 보우의 눈치를 살핀다. 그러다 보우 쪽을 본다. 무심히 언덕길을 올라가고 있는 보우. #동. 토굴 안 불상 앞에 향을 피우고 참선을 시작한 보우. 고요하다. 신돈:...... 바라본다. 미동도 않는다. 신돈: 내 몸의 반은 귀한 피가 흐르고 있고, 이쪽 반은 천한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제 어미는 옥천사의 노비였는데 개경에서 내려온 관리 하나가 옥천사에 놀러왔다 제 어미와 눈이 맞은 모양입니다 보우:.... 신돈:(벽에 기대며) 계집을 품에 안은 사내의 입에서 무슨 거짓말이든 안 나오겠습니까. 미련한 제 어미는 개경으로 지아비를 만나러 올라갔는데 대문도 들어서지 못하고 매만 흠씬 두들겨 맞았답니다. 거기다 뱃 속에 애까지 들어있다고 하니까 하인놈들을 시켜 산 속으로 끌고 가서 아예 난도질을 해서 거적으로 덮어놨다지요 보우:..... 신돈: 제 어미는 그냥 죽어버리려고 했으나 뱃속의 애가 불쌍해서 한사코 명줄을 잡고 있었는데 우연히 그 부근을 지나던 스님의 눈에 띄어 보우: 나를 구하지 않고 어찌 너를 구할 수가 있겠느냐 신돈:......(바라본다) 보우: 이것이냐 저것이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느니라 신돈:...... 슬며시 자세를 바로한다. 그러나 다시 고요한 보우. #개태사의 뜰 들어오던 신돈, 멈춘다. 큰스님: 이놈 자식. 이놈 자식 원현의 아랫도리를 지팡이로 내려치는 큰스님. 팔짝팔짝 뛰며 피하고 있는 원현. 큰스님: 밖에다 살림을 차렸느냐 어쩌자고 부처님 곳간의 양식을 야금야금 훔치는 게야. 이놈 자식. 이놈 자식 원현: 잘못했습니다 큰스님. 저는 딱 한번 부엌 선반에서 누룽지를 훔쳐먹은 죄밖엔 없습니다 큰스님: 내가 좋아하는 누룽지야.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르는 늙은이가 한밤중에 딱딱한 누룽지를 오물오물 씹어먹는 재미로 사는데 그걸 훔쳐. 이놈 자식. 이놈 자식 연방 때리고 연방 피한다. 그 모양이 재밌어서 허허 웃고 있던 덕운이 신돈을 발견한다. 덕운: 큰스님. 저기 신돈을 손가락질하며 고자질하는 덕운. 큰스님, 신돈을 본다. 슬금슬금 밖으로 도망치는 신돈. 큰스님: 너 이놈. 거기 못 서 냅다 도망치는 신돈. 덕운: 제가 편조를 잡아올까요 큰스님: 니놈이 무슨 재주로 저 놈을 잡아와. 귀신도 못 잡아가는 놈을 지팡이로 덕운의 어깨를 힘껏 내려치는 큰스님. 덕운: 아이구 아파서 어깨를 움켜쥐고 주저앉는 덕운. 놀래서 보는 원현. 덕운: 웬 힘이 그렇게 세십니까 큰스님: 고자질한 벌이다, 이놈 또 한번 내려치는 큰스님. #어느 비탈길 비탈길을 앞서 올라가는 곰순이네. 그 뒤를 따라가는 신돈. 곰순이네: 이런 썩을 놈. 언제까지 애물단질 나한테 맡겨놓고 샛서방 드나들 듯 할 거냐 신돈: 그 동안 별 일 없었지요 곰순이네: 이놈아. 그렇게 오입질이 하고 싶으면 절간하고 뚝 떨어진 데다 계집 년을 숨겨놓을 것이지, 큰스님한테 들키면 너 죽고 나 죽어 이놈아 신돈: 큰스님이 무슨 힘이 있다고 이모를 죽이겠오 곰순이네: 내가 왜 니 이모야. 니 놈하고 나하고 피 한방울 섞였냐? 신돈: 우리 어머니 살아 생전엔 형님아우 하자고 그렇게 조르더니 이젠 핏줄 타령이요 곰순이네: 이구. 하긴 그 형님이 살아 있으면 널 중놈으로 만들었겠냐. 몸을 팔아서라도 장가를 들이고.... 앞쪽에 초막이 보인다. 곰순이네: 퍼뜩 들어가봐. 하루 종일 칡뿌리만 갉아먹고 있다 신돈: 원현스님이 양식께나 훔쳐 날랐을 텐데 칡뿌리가 다 뭐요 곰순이네: 내가 아냐 이놈아. 입덧을 한다고 꿱꿱거리고 있는데 신돈:..... 놀래서 초막을 바라본다. 소리치고 두리번 주위를 살피는 곰순이네. 신돈:.......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간다. #동. 초막 안 들어오는 신돈. 신돈:.....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칡뿌리를 움켜쥐고 떨고 있는 허씨의 딸. 곰순이네:(밖에서 소리) 어느 놈 눈에 띄었는지 나만 보면 수군대 #동. 앞 곰순이네:(주위 살피며) 아예 산 속에 숨기든지 더는 여긴 못 있는다 연방 주위를 살피는 곰순이네. #동. 안 신돈:..... 허씨의딸:..... 겁에 질려 신돈을 바라본다. 신돈: 아일 가졌소 허씨의딸:(숨이 막히듯 몸을 웅크린다) 신돈: 홀몸이 아니라고 진즉 말할 것이지 허씨의딸:(배를 감싸쥐며) 저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습니다. 이 아이만은 살려주세요 신돈:..... 물끄러미 바라보는. #개태사의 농가 방 안(밤)(회상) 가뿐 숨 몰아쉬며 어린 신돈의 가슴을 부여잡고 끌어당기는 신돈의 어머니. 어머니: 에미 말 잘 들어. 니 몸속엔 귀한 피가 흐르고 있다. 에미하곤 달라. 그러니 내가 죽거든 에민 잊어버려라. 산속 깊이 어밀 묻어버리고 다 잊어버려 어린신돈:(무서워서 울기 시작한다) 어머니:(숨 몰아쉬며 비명치듯) 울지마라 이놈. 세상천지에 너 하나뿐야. 누구보고 들어달라고 울고 있는 게야 어린신돈:(울음 그치는) 어머니:.....(가뿐 숨 몰아쉬며) 잊지마라....에미는....에미는 천해도....니 아버지는 귀한.....귀한 분이셨다 문득 숨을 멈춘다. 두 눈은 여전히 부릅뜬 채 허공을 노려보고 있다. 그 눈. #초막. 안(현실) 신돈:.... 칡뿌리를 허겁지겁 갉아먹고 있는 허씨의딸. 신돈:(일어나며) 누가 묻거든 내 자식이라고 하시오 나가는 신돈. #동. 앞 나오는 신돈. 쩔쩔매고 있는 곰순이네. 큰스님: 쯧쯧쯧 혀를 찬다. 옆에 자라목이 된 원현과 싱글벙글 웃고 있는 서있는 덕운.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신돈. 큰스님이 초막 안으로 간다. 신돈: 스님 막으려 한다. 큰스님: 비켜라 이놈. 이 못된 놈 신돈을 뿌리치고 안으로 들어가는 큰스님. 신돈:(원현을 본다) 원현: 미안합니다 편조스님. 큰스님께서 자꾸 물으시는데 차마 거짓말을 할 수가 없어서 덕운: 발없는 소문이 천리길을 간다는 속담도 못 들어봤냐 #동. 안 겁에 질려 구석에 몸을 처박는 허씨의딸. 큰스님:.....(찡그리며 혀를 끌끌 찬다) #개태사. 큰스님 방. 앞(밤) 적막 속에 잠긴 개태사. 원현이 걱정이 돼서 방쪽을 살피고 있다. #동. 방 안(밤) 두 손에 누룽지를 잔뜩 움켜쥐고 오물오물 씹고 있는 큰스님. 그 앞에 천연덕스럽게 무릎을 꿇고 있는 신돈. 큰스님:(보더니) 미련한 놈. 지 몸 하나 건사하지 못하는 주제에 적선은 신돈: 오죽 사정이 딱하면 거기다 숨겨놨겠습니까 큰스님: 딱한 건 니 놈 사정이야. 사방에 방이 붙었다면서 들키면 어떡하려구 신돈: 그러니 큰스님께 부탁을 드리는 거지요 큰스님: 살생은 니놈이 했다면서 신돈: 제 걱정은 마십시오. 저는 삼십 육계 줄행랑을 놓으면 그만이지요 큰스님: 평생 도망다니면서 살겠다는 게냐 신돈:...... 큰스님: 네 놈을 죽게 내버려두는 건데.....아 그 때 산 속에서 그냥 모른 척 하고 지나갔으면 될 일을 가지고.....(입맛 다신다) 신돈:(싱글거리며) 큰스님께서 제 어미를 살려주신 것도 업보고, 제 어미 대신 절 키워주신 것도 업보고, 제가 초막에 숨어있는 처자를 살려준 것도 업보지 않습니까 큰스님: 그게 다 내 탓이란 말이냐 신돈: 스님 말씀이 그렇잖습니까. 제 어미를 살려주는 바람에 큰스님:(혀를 찬다) 신돈: 스님. 이번에도 한번만 살려주십시오 큰스님: 할 수 없다 신돈:(반가워서) 무슨 묘안이라도 떠오르셨습니까 큰스님: 머리 기른 김에 아예 파계하고 환속해서 그 색시하고 살림을 차려 한 세상 살다 가거라 신돈: 그렇겐 못 합니다 큰스님: 살 길이 그 수밖엔 없는데 못하긴 신돈: 스님 큰스님:(고개 돌린다) 신돈: 스님 큰스님: 왜 신돈: 제가 어딜 좀 다녀올 작정입니다 큰스님: 다녀오든 말든 신돈: 겨울 나고 봄에 돌아올 예정인데 그 때까지만 큰스님이 그 처녀를 맡아주시지요 큰스님: 배 안에 애가 들었다면서 무슨 처녀 신돈: 무슨 말씀을 그렇게 험하게 하십니까 큰스님: 너 이놈. 바른대로 대. 그 애가 뉘 애냐 신돈:(기막힌) 큰스님: 니 놈 짓이지? 신돈: 그렇게도 절 못 믿으십니까 큰스님: 중이 살생을 했으면 볼장 다 본 거지. 그 판에 애 하나 더 만들었다고 지옥을 두 번 가겠느냐 이 놈 벌떡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큰 절 올리는 신돈. 신돈:(엎드려서) 이 은혜는 죽는 날까지 뼛속 깊이 새겨두고 잊지 않겠습니다 스님 그런 신돈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큰스님. #동. 마당(밤) 쪽마루에 걸터앉아 훌쩍거리고 있는 원현. #동. 방 안(밤) 엎드린 채 움직이지 않는 신돈. 여전히 누룽지를 두 손에 움켜쥔 채 신돈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큰스님. #어느 들길 신돈이 간다. #어느 산길 신돈이 간다. #소설산의 계곡 신돈이 올라온다. 멈춰서 본다. 보우의 암자가 보인다. #동. 보우의 토굴 안 들어오는 신돈. 보우가 면벽하고 동안거에 들어갔다. 신돈:.... 말없이 바랑을 내리고 보우와 등을 지고 앉아 면벽을 시작하는 신돈. #영수전의 마당(밤) 꺼덕거리며 기철이 온다. 달려오는 최만생. 기철: 대비께서 무슨 일로 날 찾으시는가 최만생: 저.....(당황해서 쩔쩔 매는) 기철: 어허, 답답하기는 덕녕공주:(안에서) 뭘 하고 있느냐. 덕성부원군을 부르라 하지 않느냐 기철:...... 전각을 노려본다. 최만생이 기철에게 귓속말을 건넨다. 찔끔하는 기철. #동. 방 안(밤) 소반에 놓인 약그릇. 기철: 독, 독이라니오 마마 덕녕공주: 내가 압니까. 온갖 약을 써도 전하의 환후에 차도가 없는 것이 수상하여 은비녀를 담궈보니 시퍼런 독이 묻어나왔어요 기철: 저런 죽일 놈들이 있나. 대전 어의들을 당장 잡아다가 덕녕공주: 벌써 잡아다 주리를 틀었으나 굳게 입을 다물고 죽더이다 기철: 잘하셨습니다 대비마마 덕녕공주: 나보다 더 무서운 사람이 뒤에 있는 모양이지요 기철: 그, 그럴리가요 덕녕공주: 아무래도 안 되겠습니다. 이 넓은 궐 안에 어느 놈이 독을 타는지 다 일일이 단속을 할 수가 없으니 지금 당장 전하를 뫼시고 피접을 가야겠어요 기철: 이 밤중에 말씀입니까 덕녕공주: 밖에 최환관 있느냐 #동. 복도(밤) 최만생: 예, 대비마마 덕녕공주:(안에서) 전하를 덕경부로 뫼실 것이야 #동. 안(밤) 기철: 덕경부라니오. 덕경부라면 강릉대군의 생모인 홍씨의 사택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덕녕공주: 내가 믿을 사람이 거기 밖에 없어요 싸늘한 미소. #광화문. 앞(밤) 대궐문이 열린다. 연이 나온다. 기진한 충목왕을 안고 연 위에 있는 덕녕공주. #희비 윤씨의 처소. 방 안(밤) 경창부원군을 끼고 앉아 펄쩍 뛰는 희비윤씨. 희비: 하필이면 덕경붑니까. 그건 대비의 의중에 강릉대군이 들어 있다는 뜻이 아닙니까 기철:(싱글대며) 그게 어디 대비의 뜻대로 되는 일입니까 (웃으며) 염려하지 마세요. 내가 이미 연경으로 사람을 보내 누이에게 부탁을 해놨어요 희비: 누이라면? 기철: 대원 제국의 황후마마시지 누굴 말하는 거겠습니까 (너털 웃음 웃고) 고려의 국왕은 경창부원군께서 이으실 겁니다 경창부원군을 바라보며 싱긋 웃어보이는 기철. #명덕태후의 사저. 마당(밤) 마루에서 버선발로 마당으로 뛰어내리는 명덕태후. 명덕태후: 잘 오셨습니다 대비마마. 그러지 않아도 전하의 환후가 깊으시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모릅니다 덕녕공주의 손을 마주잡고 흔드는 명덕태후. 덕녕공주:(충목왕에게) 전하, 인사 올리세요. 전하께는 할머님이 되십니다 명덕태후: 인사라니오. 무슨 망칙한 말씀을. 인사는 이 할미가 올려야지요 (충목왕의 손 덥썩 잡고) 오늘에야 할미가 전하를 뵙습니다. 얼마나 뵙고 싶었는지 (눈물을 훔치더니 김상궁에게) 뭘하고 있느냐. 전하를 어서 안으로 뫼시잖고 김상궁: 예, 마마 충목왕을 안으로 모시는 김상궁. 따르는 상궁 내인들. 최만생:(못마땅해서 바라본다) 명덕태후:(청지기에게) 얼른 야참을 준비하거라 분주히 흩어지는 청지기와 하인들. 명덕태후:(덕녕공주의 손 다시 잡으며) 잘 오셨습니다 대비마마. 이 할미가 전하를 지켜드리겠습니다 #동. 대문. 앞(밤) 야참을 내오는 청지기와 하인들. 군사들이 모닥불을 피워놓고 국과 술을 먹는다. #동. 마당(밤) 마당엔 대궐의 환관과 신돈, 나인들이 야참을 먹고 있다. 명덕태후: 술과 고기를 넉넉히 내오너라. 국밥도 따끈하게 말아 올리고 신바람이 난 명덕태후. 그런 명덕태후를 바라보던 김상궁의 눈시울이 붉어진다. 명덕태후와 눈이 마주친다. 김상궁:(허리를 굽히며) 경하드리옵니다 마마. 연경에 계시는 강릉대군께서 이 소식을 들으시면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또 한번 허리굽히는 김상궁. 명덕태후: 암. 기뻐하시구 말구 #동. 안방(밤) 덕녕공주:...... 가만히 충목왕을 바라보는 덕녕공주. 보료에 기대어 겨우 몸을 의지한 채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충목왕. 덕녕공주:(문득 목이 메어) 힘이 드십니까 충목왕: 아닙니다 어머니 안간힘 쓰듯 몸을 일으켜 앉는 충목왕. 덕녕공주: 그냥 누워계세요 충목왕: 아닙니다 어머니. 제가 오래 살아야지요. 제가 일찍 죽으면 어머니를 누가 돌봐드리겠습니까 덕녕공주:....(치미는 눈물 겨우 꾹 누르는) 충목왕:(웃으며) 어머니. 이리 가까이 오세요 덕녕공주:..... 충목왕: 어서요 어머니 덕녕공주: 예, 전하 애써 웃으며 가까이 다가앉는 덕녕공주. 덕녕공주를 바라보는 충목왕. 덕녕공주:(웃으며) 말씀을 해보세요 충목왕:..... 가만히 손을 들어 덕녕공주의 얼굴을 어루만지는 충목왕. 그런 충목왕의 손을 가만히 잡는 덕녕공주. 충목왕: 울지마세요 어머니 덕녕공주:(숨이 막힌다) 충목왕: 약한 모습을 보이시면 안 됩니다. 이 세상 천지에 어머니뿐이시니 약한 모습을 보이시면 살아남지 못하십니다. 그러니 제가 죽어도 울지 마세요....... 덕녕공주:..... 치미는 오열. 충목왕의 두 손을 부여잡고 그 손에 얼굴을 부비며 숨죽여우는 덕녕공주. #연경의 고려촌 거리(밤) 취객들로 넘치는 거리. 안도치가 부리나케 달려온다. 앞에서 와아 하는 함성. 멈춰서 보는 안도치. 눈이 둥그래진다. 상자더미 위에서 술 한 병을 단숨에 비우고 있는 공민왕. 빈 술병을 내던진다. 판돈을 나누는 노름꾼들. 돈을 한움큼 받아쥐고 신이 난 털보. 공민왕이 술병을 다시 집어든다. 노름꾼: 자자. 돈들을 거시오 다시 요란하게 돈을 거는 노름꾼들. 털보, 망설인다. 노름꾼: 어느 쪽에 걸거요 털보:..... 공민왕을 본다. 취해서 금방 쓰러질 듯 휘청거리고 있는 공민왕. 노름꾼: 빨리 정하시오 털보: 에라 모르겠다. 마시는 쪽이다 돈을 내민다. 사내:(잡으며) 형님. 이번엔 못마시는 쪽에 거시지요. 벌써 세 병 쨉니다 흠칫해서 공민왕을 다시 보는 털보. 여전히 비틀거리고 있는 공민왕. 노름꾼: 걸거요 말거요 털보: 에라 못 마시는 쪽이다 딴 돈을 내미는 털보. 노름꾼: 자, 자, 시작합니다 와아 각각 돈 건 쪽에 응원하기 시작하는 노름꾼들. 공민왕이 술을 마시기 시작한다. 안도치: 대군마님 보다 못해 사람들을 헤치고 공민왕에게 가려고 하나 사람들에게 밀려나는 안도치. 꿀꺽꿀꺽 술을 들이키는 공민왕. 잘 한다고 외치는 사람들. 걱정이 돼서 눈을 깜빡이는 털보. 마지막 한방울까지 술을 들이키고 빈 술병을 내던지는 공민왕. 털보: 저, 저 놈이 와아 터지는 함성. 판돈을 나누는 노름꾼들. 화가 나서 사내의 머리를 쥐어박는 털보. 상자더미 위에서 휘청거리던 공민왕이 기절하듯 쓰러진다. 안도치: 대군마님 사람들을 헤치고 달려가 공민왕을 부축하는 안도치. 안도치: 정신차리세요 대군마님 노름꾼들 흩어져간다. 안도치: 대군마님. 흥성궁에서 당장 드시라는 전갈이 왔습니다. 황후마마께서 대군마님을 개경으로 보내주겠다고 약속을 하셨답니다 공민왕:(겨우 눈을 떠서 보더니) 개경? 안도치: 예, 대군마님. 꿈에도 그리던 고향이 아니옵니까 (눈물 훔치고) 어서 일어나십시오 대군마님 공민왕을 부축해서 일으키려는 안도치. 털보:(막으며) 내 돈을 물어주기 전엔 아무 데도 못갈 줄 알아 놀래서 보는 안도치. 털보와 사내들이 둘러싼다. 털보:(공민왕에게) 니 놈이 마신 게 술이냐, 물이냐 이놈. 어디 냄새 좀 맡아보자 공민왕의 멱살을 잡아 일으키는 털보. 안도치: 이놈. 그 분이 누군 줄 알고 덤벼드는 안도치를 사내들이 내동댕이친다. 안도치: 아이쿠 나뒹구는 안도치. 털보:(공민왕의 입에다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더니) 웬 놈의 술 냄새가 이렇게 싱거우냐 (사내들에게) 얘들아, 니들도 냄새 좀 맡아봐라. 이게 술 냄새냐, 물 냄새냐 번갈아가며 냄새 맡는 시늉을 하는 사내들. 안도치: 이놈들. 그 어른이 누군줄 알고 행패냐 다시 덤벼x드는 안도치. 털보가 안도치의 멱살을 잡아 번쩍 들어올린다. 허공에서 버둥거리는 안도치. 노국공주:(소리) 그 사람을 놓아줘라 소리 나는 쪽을 바라보는 털보. 남장을 한 노국공주와 홍화가 서있다. 털보: 이놈들이 내 돈을 훔쳐갔으니 공자께선 상관 마시오 노국공주: 그 돈은 내가 갚아주마 ‘보초’를 한뭉치 던져준다. 얼결에 안도치를 놓아주고 돈을 받아드는 털보. 어리둥절하다. 노국공주: 부족하냐 털보:..... 돈을 확인하더니 입이 찢어진다. 털보: 가자 사내들을 데리고 가버린다. 안도치: 대군마님 다시 공민왕을 부축해 일으켜 세우는 안도치. 안도치: 큰일 날뻔 하셨습니다. 다행히 앞에 서 계시는 공자 덕분에 큰 욕은 면했습니다 공민왕:.... 노국공주를 바라본다. 노국공주: 내 화살을 가로막던 그 패기는 다 어디로 가고 부랑배들한테 봉변을 당하고 계시오 공민왕:.... 술이 깨듯 바라본다. 노국공주:..... 빙긋이 웃더니 돌아서 가버리는 노국공주. 경멸하듯 공민왕을 훑어보고 노국공주를 따라가는 홍화. #동. 부근 거리(밤) 노국공주를 부지런히 따라오는 홍화. 홍화: 저런 술주정뱅이를 뭣하거 도와주십니까 노국공주: 일전에 내가 저자에게 빚을 졌다 홍화:(놀래듯) 빚이라니오. 공주마마께서 무슨 빚을 지셨다는 겁니까 대답없이 앞서가는 노국공주. 그 앞을 가로막는 털보와 사내들. 노국공주:..... 뒤돌아본다. 뒤에도 사내들이 막고 있다. 노국공주: 욕심도 많구나 털보: 가진 걸 다 내놔 노국공주:(빙긋 웃으며) 힘으로 뺏어보시지 홍화:(다급해서) 아, 아가씨 털보: 아가씨? (웃으며 사내들에게) 오늘 밤엔 횡재를 할 모양이다. 돈도 생기고 계집 맛도 보게 생겼으니 와아 웃는 사내들. 사내 하나가 홍화의 손을 나꿔챈다. 그 사내를 가격하는 노국공주. 우르르 덤비는 사내들. 홍화를 보호하며 사내들을 가격하는 노국공주. 웃고 있던 털보가 안되겠다 싶은지 칼을 빼든다. 그 칼을 피해 털보의 가슴팍을 걷어차는 노국공주. 나뒹구는 털보. 털보: 죽여라 사내들이 일제히 각종 무기를 꺼내들고 노국공주를 에워싼다. 요리조리 피하는 노국공주. 점점 불리해진다. 뒤로 물러나다가 주저앉는다. 노국공주를 향해 털보의 칼이 내리꽂히려는데 홍화의 비명소리와 함께 털보가 꼬꾸라진다. 털보의 팔에 화살이 박혔다. 뒤이어 사내들도 화살을 맞고 쓰러진다. 도망치는 털보와 사내들. 홍화:(보더니) 태자마마 쿤란태자가 호위병들을 데리고 서있다. 무안해서 옷을 툭툭 털며 일어나는 노국공주. 쿤란태자: 과연 소문대로 대단한 솜씨요 놀리듯 웃는 쿤란태자. 저도 모르게 살짝 얼굴을 붉히는 노국공주. #공민왕의 처소. 마당(밤) 물동이를 들고 떨고 있는 안도치. 난간에 기댄 공민왕. 취해서 쓰러질 것 같다. 김용: 뭐하고 있는 거냐. 대군께서 술이 깨셔야 황후마마를 뵈러 갈 것이 아니냐 안도치:(안절부절) 김용: 어허. 일각이 급하거늘 조일신: 이리 주게 조일신이 나서 물동이를 뺏더니 공민왕의 머리에 확 붓는다. 정세운: 무슨 짓인가 말리려하나 이미 늦었다. 물벼락을 맞고 푸푸거리며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는 공민왕. 박불화:...... 보더니 혀를 끌끌 차며 옆에 있는 이제현을 바라본다. 이제현: 오랜 귀양살이에 심신이 함께 피폐해지셨소이다. 그러니 박불화:(못마땅해서) 귀양살이라니오? 이제현:...... 가만히 한숨 쉬고 공민왕을 바라본다. 안도치가 지극정성으로 공민왕의 얼굴을 닦아주고 있다. 조일신: 그만 정신을 수습하시고 옷을 갈아입으시지요. 그런 꼴로 황후마마를 뵐 수는 없지 않습니까 정세운: 오늘은 아무래도 안 되겠네. 우선 대군마님을 쉬시게 해드리고 아침에 황후마마를 뵈러 들어가는 것이 김용:(나서며) 이 사람아. 황후께서는 지금 이 시각이 한 나절이시네. 초저녁에 일어나셨다 새벽녘에야 잠자리에 드시는 걸 몰라서 그러시나 조일신:(공민왕의 몸을 흔들며) 그만 일어나시지요. 이런 꼴을 황후께서 보시면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주정뱅이를 고려의 국왕으로 삼으시겠다는 말씀이 나올 리가 없지요 조일신이 몸을 흔들자 고개를 떨구며 옆으로 쓰러지는 공민왕. 안도치:(얼른 부축하며) 대군마님 조일신: 어허, 이런 낭패가 있나 안도치: 정말 너무들 하십니다 김용: 너무 한 건 네 놈이야. 대군을 제대로 모시라고 몇 번이나 일렀느냐. 걸핏하면 술 마시고 유곽 출입을 일삼으니 이러고서야 원 안도치:(악쓰듯) 귀공들의 눈에는 부귀영화만 보이고 가엾으신 대군마님의 처지는 안중에도 없으십니까 조일진: 이 놈이 불알이 없는 대신 양기가 입으로 뻗쳤구나. 어디다 대고 말대꾸야 웃어대는 조일신과 김용. 이제현:(노해서) 그만들 하시게. 목불인견이라더니 내가 이런 꼴을 보자고 노구를 이끌고 연경까지 왔는 줄 아는가 머쓱해서 물러서는 조일신과 김용. 정세운: 면목이 없습니다 익재대감. 이 사람들이 오랜 객지 생활에 지쳐서 이제현:(버럭) 나라를 바로 세우려고 내가 여기까지 온 것이야 고개 푹 숙이는 정세운. 못마땅해서 헛기침하며 고개 돌리는 김용과 정세운. 이제현: 선왕께서 하세하신 이후에 금상께서 연소하신 까닭으로 국정이 바로 서질 못하고 있어. 뿐인가. 금상게서 환후가 위중하신 까닭으로 박불화: 그만 하시지요. 그만 하셔도 잘 알아들었을 겁니다 이제현: 으음 (신음) 박불화: 제가 황후마마를 뵙고 적당히 둘러대겠습니다 돌아설 기세다. 조일신:(다급해서) 어린 임금이 언제 변을 당할지 모르는 판입니다. 오늘 내일 안으로 황후마마의 낙점을 받고 강릉대군께서 급히 개경으로 돌아가셔야 왕위를 물려받을 것이 아닙니까 김용: 자정원사께서는 금상의 아우님이 계시다는 걸 잊으셨습니까. 강릉대군께서 개경으로 돌아가지 못하면 이제현: 이 사람들. 뉘 앞에서 막말을 해대는가 김용: 막말이라니오 (두 눈을 부릅 뜬) 이제현: 어허 기기 막히다. 공민왕:(소리) 가면 될 것이 아닙니까 놀래서 모두 본다. 공민왕이 비틀비틀 일어난다. 공민왕: 가지요. 고려의 국왕 자리를 주겠다는데 못갈 게 뭡니까 비틀비틀 방으로 들어간다. 안도치: 대군마님 부리나케 뒤쫓아간다. 이제현:.... 바라본다. 안도치의 부축을 받으며 안으로 들어가는 공민왕. 박불화:........ 또 한번 혀를 차며 고개를 설레설래 젓는 박불화. 나직히 신음하는 이제현. 박불화: 노대감께서 헛걸음을 하신 것 같습니다 (혀를 찬다) 이제현:..... 방 쪽을 바라본다. 방의 불빛. 그 위에 명덕태후의 잔잔한 웃음 소리. #명덕태후 처소의 안방(회상) 명덕태후: 조신하기도 하구나 혜비:...... 다소곳이 고개 숙이는 혜비. 명덕태후: 익재대감. 나는 이 아이를 내 며느리로 정했습니다 이제현:(숙이며) 과분하신 명덕태후:(단호히) 몽골의 여자는 안 됩니다. 더는 몽골의 여자가 대궐의 안방을 차지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이제현:(또 숙이며) 과분하신 명덕태후: 나는 몽골의 계집들 때문에 한이 맺힌 사람예요. 충숙왕을 지아비로 모시고 두 아들을 낳았습니다. 뿐입니까. 내 큰 아드님이 충혜왕이고 내 손주가 금상이 아닙니까. 그런데 몽골의 여우 같은 계집들이 개경으로 들어와 내 자리를 빼앗고 대비 자리를 빼앗고 태후자리를 빼앗아갔습니다 이제현: 으흠 명덕태후: 어림 없는 소립니다. 강릉대군께서 보위에 오르면 내 며느리는 고려의 규수를 고를 겁니다 (혜비의 손을 다정히 잡으며) 오늘부터는 나를 어머니라고 불러라 #공민왕의 처소. 마당(밤)(현실) 이제현:....... 방의 불빛.가만히 한숨 내쉬는 이제현. #노국공주의 전각. 방 안(밤) 홍화:(중국어로) 말씀도 마십시오. 태자마마께서 때마침 구해주지 않으셨으면 정말 큰일 날뻔 했습니다 노국공주:(중국어) 무슨 소리냐. 내 혼자 힘으로도 그놈들을 혼내줄 수가 있었다 쿤란태자:(중국어, 웃으며) 앞으로 또 그런 일을 당하면 팔짱 끼고 구경만 하고 있겠소 노국공주:(흘키듯) 내 허락도 없이 미행을 해놓곤 오히려 날 놀리십니까 쿤란태자:(더 웃으며) 걱정이 되니까 그렇지요. 거기가 얼마나 위험한 곳인 지나 알고 있는 겁니까 위안:(웃으며) 오늘은 아무래도 보탑실리가 태자마마께 큰 절을 올려야 하겠다 쿤란태자: 대인께서 그렇게 말씀을 해주시니 그럼 절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으흠 절을 받겠다는 자세다. 노국공주: 그렇게 인살 받고 싶으시다면 큰 절을 올리지요 살짝 무릎을 굽혀 인사를 올리는 노국공주. 쿤란태자:(위안에게) 오늘은 내가 보탑실리 공주의 고집을 꺾었습니다 유쾌한 쿤란태자와 위안의 모습. #공민왕의 처소. 마당(밤) 공민왕이 옷을 갈아입고 나온다. 반듯한 자세다. 공민왕:...... 김용과 조일신을 가만히 바라보는 그 잔잔한 눈초리. 저도 모르게 허리를 굽히는 김용과 조일신. 공민왕:(조용히) 너희들의 모멸 덕분에 술이 다 깼으니 그 은혜는 평생 잊지 않을 것이야 조일신:(무릎 꿇으며) 소인이 어찌 대군마님을 능멸하려 하였겠나이까 김용:(무릎 꿇으며) 대군마님의 처지가 가엾고 분하여 말을 자르듯 성큼 앞서가는 공민왕. 안도치: 대군마님. 소인이 먼저 불을 밝히겠습니다 등불을 들고 급히 앞으로 나간다. 식은땀을 흘리는 김용과 조일신. 재빨리 공민왕의 옆으로 따라붙는 이제현. 이제현: 기황후를 만나시거든 허리를 굽히고 또 굽히십시오. 아무리 비굴하셔도 고려의 국왕자리를 얻는 기쁨에 비하겠습니까 공민왕:(멈추더니) 염려하지 마세요. 나는 기황후의 발바닥이라도 핥을 겁니다 앞서가는 공민왕. 감탄에 차서 바라보는 이제현. #노국공주의 전각. 방 안(밤) 주안상. 시중드는 홍화. 위안: 그래, 오늘은 몽골인을 만나보았느냐 노국공주:..... 위안: 오늘도 못 찾았단 말이냐 노국공주: 얼굴은 몽골인이었으나 배는 튀어나오고 얼굴엔 개기름이 흘러내리는 한족들 뿐이었습니다 위안:(끄덕이는) 노국공주: 의식주가 편하면 사람의 정신도 나태해진다고 들었습니다. 말을 타고 초원을 누비던 몽골인의 기상은 고사하고 말을 타는 법이나 잊지 않고 있는지 그것도 의심이 갈 정도였습니다 위안:(신음하듯 끄덕이고 술잔을 입으로 가져간다) 쿤란태자: 대체 무슨 말씀을 나누고 계시는 건지 위안: 태자마마. 한줌도 안 되는 우리 몽골족이 그 열 배가 넘는 한족의 땅을 점령하고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겠습니까? 쿤란태자:... 위안: 몽골이 중원을 차지한 덕분에 부귀영화를 얻었으나 그 중원의 부귀영화가 몽골을 점령하고 있습니다 쿤란태자:(웃으며) 그렇다고 이 비옥한 땅을 버리고 다시 척박하기 그지없는 몽골의 초원으로 돌아갈 수는 없지 않습니까 노국공주: 돌아가야지요 태자마마. 몽골로 돌아가서 사막의 모래 바닥에서 잠을 자고 초원을 떠돌며 양들을 키우며 살아야 합니다 쿤란태자:(웃으며) 그래서 공주께서는 밤마다 연경의 밤거리를 헤매며 진정한 몽골인을 찾아다녔단 말씀입니까 노국공주:(토라지듯) 나는 진심으로 말을 하고 있는데 태자마마께선 자꾸만 나를 놀리기만 하십니까 쿤란태자: 내 생각도 그래요. 나 역시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소이다 노국공주:(기뻐서) 정말이십니까 태자마마 (벌떡 일어나며) 태자마마를 위해서 소녀가 몽골의 춤을 보여드리겠습니다 몽골의 춤을 추기 시작하는 노국공주. 그 활달한 모습. 손바닥으로 장단을 맞추는 쿤란태자. 흐뭇해서 바라보는 위안. #기황후의 처소. 방 안(밤) 화사한 미소를 짓고 앉아있는 기황후. 숙이고 서있는 공민왕. 그런 공민왕을 재밌다는 듯 허리를 굽혀 공민왕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기황후. 조금 흠칫해서 물러서는 공민왕. 기황후: 더 가까이 오라 공민왕:(놀라듯 본다) 기황후: 나는 본디 천한 태생이다. 알고 있느냐 공민왕:.......(조금은 숨이 막히는) 기황후: 가까이 오라 주춤 다가서는 공민왕. 기황후: 고려의 천한 계집이 공녀로 뽑혀 원에 팔려 갔다가 운수대통하여 원나라의 제 이 황후의 자리에 올랐다고 수군수군거리고 있다지? 공민왕:.......(마른침 삼키는) 기황후: 내 얼굴을 자세히 보거라. 고려의 천한 계집이었느니라 공민왕:(다급히 숙이며) 원의 볼모로 끌려온 소인의 신세가 어찌 황후마마의 천한 태생보다 낫다고 하겠나이까 박불화: 무엄하오 공민왕:(당황하여) 소인이 마마의 태생을 입에 담은 것은 박불화: 무릎을 꿇으시오 무릎을 꿇는 공민왕. 마치 겁에 질린 모습이다. 기황후, 빙긋 미소 짓더니 손을 내민다. 떨고 있는 공민왕. 기황후: 손을 다오 공민왕:.......(본다) 기황후의 손. 마른침 삼키며 손을 내미는 공민왕. 그 손을 꽉 잡아쥐는 기황후. 기황후: 계집보다 더 보드라운 손을 가졌구나 공민왕:.....(떨 듯이 보며 마른 침을 꿀꺽 삼켜보이는) 기황후: 내가 고려의 국왕자리를 주면 날 위해서 무엇을 주겠느냐 공민왕: 황후마마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기황후: 목숨이라도 내놓겠다는 뜻이냐 공민왕:.... 기황후: 목숨은 안 되고? 공민왕: 그것보다 더 한 것이라도 공민왕의 손을 끌어당기는 기황후. 숨이 막히는 공민왕. 기황후: 이 고운 손에 피를 묻힐 자신이 있느냐 공민왕:........ 기황후: 때로는 너의 형제의 피를 묻혀야 할 것이고, 생사를 같이 하기로 약속했던 동지의 피를 묻혀야 할 것이고, 심지어는 너를 낳아준 부모나 자식을 죽여야 할 지도 모른다. 그것이 권력의 모습이야. 자비로운 얼굴 뒤에는 항상 냉혹함을 숨기고 배반과 음모와 위선으로 가득 찬 인생을 살아야 할 것이야......(빙긋 미소 지으며 바라본다) 공민왕:......(마른침) 기황후:(가만히 고개를 내젓더니 공민왕의 손을 놓아준다) 공민왕:(다급하게) 황후마마 기황후: 피 한방울은커녕 물 한번 적셔 본 적이 없는 손이야. 그런 손을 가지고 무슨 고려의 국왕 공민왕:(더 다급하게) 마마 기황후: 물러가거라 (고개 돌린다) #동. 앞 뜰(밤) 공민왕이 나온다. 식은땀이 흐르고 있다. 이제현: 약속을 받으셨습니까 공민왕:...... 이제현: 뭐라 하십니까 공민왕:..... 가뿐 숨. #동. 안(밤) 기황후:...... 빙긋 미소 지으며 생각에 잠겨있는 기황후. 박불화: 어찌보셨습니까 마마 기황후: 내 오라비가 사람을 바로 보았다 박불화:(기대에 차서 보는) 기황후: 저 자의 비열한 얼굴 뒤에는 비수가 감춰져 있느니라. 내가 그런 자에게 고려의 국왕 자리를 주겠느냐. 어림없는 소리 깔깔거리고 웃는 기황후. 실망하는 박불화. 더욱 웃어대는 기황후. #동. 앞 뜰(밤) 기황후의 웃음소리가 새어나온다. 공민왕:.... 얼굴에 흐르는 땀. 그런 공민왕을 바라보는 이제현과 안도치. 공민왕: 죽는 날까지 잊지 않을 것이야. 오늘 당한 이 수모를 짐승처럼 신음하며 부르르 떠는 공민왕. #고려. 광화문의 성루 길게 나팔을 울린다. #남대가의 거리 깃발을 날리며 말을 달려오는 군졸. 군졸: 국왕전하께옵서 승하하셨다. 철시하라. 가무를 금하고 지금부터 도성 출입을 금한다 좌판을 치우는 상인들. 미처 치우지 못한 좌판을 짓밟는 말발굽. 상점 문을 닫느라고 아우성이고, 길 위에 엎드려 통곡하는 사람도 있다. #법왕사의 종루 종을 치고 있다. #명덕태후의 사저. 대문 앞 집을 포위하듯 에워싸는 군졸들. 기원:(말 위에서) 개미 새끼 한 마리 드나들지 못하게 하라. 덕성부원군의 허락 없이는 그 누구도 밖으로 나올 수도 없고 들어갈 수도 없느니라 군졸들을 재촉하는 기원. #동. 안방 흰보에 덮힌 충목왕의 시신. 덕녕공주:..... 넋나간 사람처럼 바라보고 있다. 시신. 덕녕공주:(중얼거리듯) 이제 겨우 열 두 살이십니다....무엇이 그리도 급해서 이렇게 서둘러 세상을 떠나십니까.... #동. 건넌방 명덕태후:.... 바들바들 떨고 있다. 불안해서 바라보는 김상궁. 명덕태후: 내 아드님은 어찌하라고.... 김상궁: 마마 명덕태후:(밖에다 대고 악쓰듯) 못 가십니다. 내 아드님이 연경에서 돌아오기 전에는 못 가십니다 김상궁: 마마 명덕태후:(울음이 터지며) 누구 맘대로 죽습니까. 내 아드님은 어찌하라구 방바닥을 치며 대성통곡하는 명덕태후. #광화문. 앞 대궐문이 활짝 열린다. 일단의 응양군이 경창부원군을 말에 태워 에워싸고 나온다. 염제신: 못간다 두 팔을 벌리고 막아서는 염제신. 멈칫하는 행렬. 염제신: 전하의 시신에 남은 온기가 아직 따뜻하거늘 경창부원군을 어디로 뫼시고 가려고 하느냐 대궐 안에서 말을 몰아 달려나오는 기철. 기철: 어느 놈이 감히 어가를 막느냐 염제신: 어가라니 기철: 보위는 하루라도 비워둘 수 없는 법. 경창부원군을 모시고 연경에 입조하여 대원제국의 황제 폐하의 황명을 받으라는 전갈이 왔다. 서둘러라 염제신은 향해 말을 모는 기철. 그 바람에 뒤로 넘어지는 염제신. 기철을 따라 경창부원군을 에워싼 응양군이 달려간다. #희비윤씨의 전각. 방 안 발을 내리고 앉아있는 희비윤씨. 윤시우: 경창부원군께서 왕위에 오르시면 기철에게 섭정을 맡기실 겁니까 희비윤씨: 섭정이라니오. 어느 나라 국법에 국왕의 어미를 두고 대신이 섭정을 했다고 합니까? 깔깔거리고 웃는 희비 윤씨. #성문. 앞 경창부원군을 에워싸고 달려가는 응양군들. 기철:..... 말 위에서 흐뭇해서 그 모양을 바라보고 서있다. #소설산의 토굴. 안 어디선가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 보우:..... 미동도 않고 면벽한 보우. 신돈:..... 자꾸만 쏟아지는 졸음을 견디지 못하고 몸을 숙이다 깜짝 놀라 깬다. 보우: 생각으로 비롯되며, 기쁨과 즐거움으로 가득하다 신돈:.... 보우: 그것이 선정의 제 일 선이다. 제 이 선은 평정에 이르면 생각이 없어지고 하나로 모아진 마음과 기쁨이 그 자리를 채운다. 제 삼 선은 일체의 덧없는 생각들을 떨쳐내고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는 단계다. 제 사 선은 마음을 오직 하나에 모음으로써 그 어떤 쾌락이나 고통도 사라져버린다 신돈: 제 오 선은 물질을 초월하여 가없는 세계에 머무는 것이며, 제 육 선은 마음이 가없는 인식의 경지에 다다르는 것이며, 제 칠 선은 인식의 경계를 넘어서 텅 비어 아무 것도 없는 영역에 마음이 머무는 것입니다 보우: 그리하여 이 아무 것도 없는 영역을 넘어서면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닌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벌떡 일어나 합장 배례하고 밖으로 나가는 보우. #동. 계곡 물 속에 몸을 담근 신돈과 보우. 신돈: 보우선사님 보우:...... 신돈: 제가 여러 가지로 무례하였는데도 저를 쫓지 않고 받아주신 까닭이 무엇입니까 보우:..... 신돈: 그것도 업보요 인연입니까 보우: 나는 본디 나를 찾아오는 사람을 쫓는 법이 없다 신돈:(싱긋 웃으며) 저는 보우선사님께서 저를 특별히 애끼시는 까닭을 물은 겁니다 보우:....(물끄러미 보는) 신돈:(웃으며) 안 그렇습니까 보우선사님. 소승을 이뻐하고 계시는 거지요 환하게 웃어보이는 신돈. 보우:......(문득) 악연도 인연이라 #동. 암자 언덕길을 내려가고 있는 신돈을 바라보고 서있는 보우. 보우: 편조야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는 신돈. 보우: 정말 너의 안광으로 바위를 쪼갠 것이냐 신돈:......(보더니) 그런 재주가 있었으면 벌써 이 세상을 두 쪽으로 갈라놨지요 (가며) 스님께서 속으신 겁니다 멀어져가는 신돈. 바라보는 보우. 싱긋 미소. #개태사. 올라가는 길 신돈, 온다. 말발굽 소리에 얼른 길 옆으로 몸을 숨긴다. 군졸들이 지나쳐간다. #언덕길 언덕을 기어오르는 신돈. 엎드려 개태사를 내려다본다. 경내를 뒤지고 있는 군졸들. 이리저리 쫓기고 있는 젊은 스님들. 부르르 떠는 신돈. 지효:(소리) 가만히 계세요 편조스님 신돈:(본다) 지효가 곧추세운 무릎을 두 손으로 감싸안고 개태사를 내려다보고 있다. 지효: 제가 한발 늦었습니다. 미리 알려드린다고 달려왔는데 신돈:...... 개태사를 다시 내려다보는 신돈. 매까지 맞는 젊은 스님들. 곰순네가 머리채를 잡혀 끌려가며 악을 쓰는 모습이 보인다. 신돈:....... 참지 못하고 다시 언덕을 내려가려고 하는데, 지효: 살생하지 말라고 큰스님께서 신신당부를 하셨습니다 신돈:...... 멈춰선 신돈. 그 눈에 치솟는 눈물. <신돈 4회 끝>